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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늘 교회 사무실로 출근하려 하였으나, 강의 관계로 학교로 향하다. 이 신학의 길이 멀고 험난하기만 하다. 벌써 17년째 공부중이다. 강도사[=전도사]고시 무난히 패스, 목사안수의 길은 멀기만 하다. 여자라서 교단 선택도 잘 하여야하고 말이다. 오늘의 토픽은 의례이다
의례란 게임과 다르다. 의례는 적을 수용한다. 그러나 게임은 그렇지 않다. 의례가 빵과 포도주로 성찬례를 거행하는 예배, 즉 빵 먹는 것도 다른 것이 의례의 맥락속 의례다. 일상속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빵 우적우적 먹기도 하고 한 꼬집씩
뜯어 먹기도 하다.
- 그런데 여기에 언어가 또 등장한다. 의례의 동기는 왜 언어와의 상관관계를 되짚어봐야 하는 걸까?
- 게임, 언어, 의례, 빵!
이 네가지의 함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례는 네가지 원인설로 거슬러 올라간다.
- 질료인 - 집을 짓는 재료가 되는 나무, 못 등
- 형상인 - 집의 청사진
- 작용인 - 목수
- 목적인 - 거주
다시 돌아와서, 의례와 게임에서 의례가 랭귀지 게임으로 남아서는 안된다.
결국 기독교적 입장에서 의례는 예배가 핵심이며, 신학으로 넘어가야 한다.
개괄적인 면에서 말이다.
또 적용해보자.
- 가사(대중가요/복음성가) 는 질료인이다
- 가수는 작용인이다
- 청중은 목적인이다
- 작사가 작곡가는 형상인이다.
키워드 하나 더, 연행?
이는 Performance Passing by, 즉, 함께 지나감이다.
연행이 없이 의례는 존재할 수가 없다. 의례의 연행은
- 첫째, 대상화
- 둘재, 상호주관성
- 세째, 주객도식의 극복
- 네째, 이분법의 극복이다.
그러면 의례의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디까지인가? 여기서 규범적 메세지와 지시적 메세지가 나온다.
설교자의 성찬식 거행은 규범적 메세지라면 성도의 자발적 찬양은 지시적 메세지이다.